2018-01-10 14:44  |  스포츠

[스포츠팬을 위한 얕은 지식사전] 제1화 '전쟁의 방아쇠를 당겨버린 축구'

[웹데일리=이민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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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1969년 한 차례 전쟁을 벌였다. 10시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이 방아쇠를 당겼다. 스포츠가 전쟁 대체재의 역할은 고사하고 양국의 갈등과 반목에 불을 댕긴 셈이다.

당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는 불법 이민자 문제로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엘살바도르는 좁은 국토 대비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엘살바도르의 하층민, 농토를 가지지 못한 하위 계층은 인접한 온두라스에 불법으로 농토를 일궜다. 온두라스에게는 매우 골칫거리였다. 온두라스 전체 농지의 20%를 엘살바도르의 불법 이민자들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온두라스 역시 하층민과 상층 계급의 빈부격차, 농지 소유 차이에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온두라스는 이런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온두라스 정부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 엘살바도르의 불법 이주 농민을 추방하기로 마음먹었다. 엘살바도르 난민들이 불법 점거한 땅을 온두라스의 하층민에게 나누어주기로 했다. 물론 엘살바도르는 비인도적이라며 격렬히 항의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갈등의 골이 깊어가던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남미예선이 열렸다. 두 나라는 깊은 감정의 골을 축구에서 드러냈다. 서로 온갖 방해 공작을 펼치며 상대 국가의 대표팀을 괴롭혔다. 밤새 숙소 근처에서 축제를 갑자기 열어 소란을 피우면서 선수들의 휴식을 방해했다. 상대 국가 대표팀 선수들의 식사에 수면제나 설사약을 타는 경우도 있었다.

살벌한 양국의 예선 결과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각각 1승씩 거뒀다. 경기의 결과는 3차 경기에서 판가름 나게 됐다. 국제축구연맹은 충돌을 우려해 3차 경기를 중립지역인 멕시코에서 치르게 했다. 3차 경기는 수많은 경찰의 삼엄한 경계에서 진행됐다. 관중과 경찰이 한데 뒤섞인 경기장에서는 긴장감이 흘렀다.


경기는 3-2로 끝났다. 경기의 승자는 엘살바도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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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피파 공식 홈페이지 월드컵 아카이브)

온두라스 전역은 경기에 패배한 것에 분노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엘살바도르와 단교를 선언했다.

축구는 전쟁을 부르고...Football War

1970년 7월 14일, 결국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를 선제공격하며 그 유명한 ‘축구 전쟁’이 터졌다.

축구 경기가 방아쇠 역할을 한 이 전쟁은 그 내용과 과정이 매우 한심했다. 1970년대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두 국가는 농업기반 국가였다. 따라서 자국 내 전쟁이 벌어지면 막대한 타격은 불가피 했다. 더군다나 두 국가는 국토가 매우 인접한 국가였다. 농지는 전쟁터가 되면서 황폐화 됐고, 지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온두라스는 안그래도 상층부의 부패로 사회적 괴리가 컸었는데 전쟁은 이를 더 증폭시켰다. 경제는 붕괴했고 국력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거리로 내버려 진 농민과 군인들은 난민이 되거나 빈곤 계층으로 전락했다. 전쟁을 일으킨 엘살바도르도 무사하지 못했다. 미국 기구의 압력과 제재를 받았다. 이는 엘살바도르가 아메리카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경제가 몰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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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지도 (이미지=구글 맵)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 전쟁과 예선 경기는 추후 월드컵 예선에 골 득실, 원정 다득점 원칙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됐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를 3-0으로 이겼으나, 1차전에서 온두라스에 1-0으로 패배했다. 당시 월드컵 예선에는 승자 승 규정밖에 없었다. 전체 결과는 1승 1패가 됐고 3차 예선으로 결과를 가려야 하는 시절이었다.

엘살바도르는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 본선에 올라갔으나 성적은 참담했다. 벨기에, 멕시코, 소련과의 경기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탈락했다. 최종 성적은 3전 3패 0득점 9실점, 요란스러운 예선과는 대비되는 창피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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